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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Book, One Action

생각이란 우리가 그대로 살아가는 것만 가치 있는거야. 데미안(by 헤르만해세)

by 꿈 많은 여우 2024. 2. 10.

 

한순간 나는 더 이상 내일 일이 두려운 게 아니라, 무엇보다 내 길이 이제 점점 더 비탈 아래로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되리라는 끔찍한 확신 때문에 두려웠다. 나는 똑똑히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잘못으로 인해 새로운 잘못을 줄줄이 저지를 게 틀림없다는 것을. 

누이들 곁에 있고 부모님께 인사하고 키스하는 것이 거짓이 되리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운명과 비밀을 숨기고 살게 되리라는 것을.

 

누구나 마음속 깊이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겠지만, 남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불편한 비밀이 있으면, 다른사람을 접할 때 내 행동, 말, 삶 자체가 거짓처럼 느껴진다. 이건 정말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솔직하게 산다는 것은 나는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이고, 용기있게 사는게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나의 경험과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알게 된다.

 

 

나는 전부터 그에게 느끼던 감사와 수줍음, 찬탄과 두려움, 호감과 내적인 거부감이 묘하게 뒤섞인 답답한 심정으로 거기 남아 있었다. 

 

헤르만헤세 특유의 모순어법.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모순적인가. 공감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느낌인지 바로 와닿지 않는가.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내키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흐~너무나 감동적인 말! 남들의 인생은 쉬워 보인다. 당사자는 내적인 갈등, 생각, 고뇌등을 치열하게 겪으며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생각을 포기하고, 행동을 포기한다. 이게 그저 나를 나아가지 못하고 현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가끔 수난의 금요일 같은 날에 아버지가 예수 수난사를 낭독해 주면 나는 열렬히 감화되어 이 처참하고 아름다운, 창백하고 섬뜩하면서도 엄청나게 생기있는 세계에서 살았다.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에서. 그리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면 이 신비에 찬 세계가 지닌 어둡고 힘찬 열정의 광채가 온갖 신비로운 전율로 나를 흔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여호와 신을 숭상하는것에 반대하지 않아, 전혀 조금도.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숭상하고 신성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된 공식적인 반쪽만이 아니라 전체 세계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해야 해. 그게 옳은 것 같아. 아니면 악마를 자신 안에 품고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앞에선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신을 만들어 내야 할 거야.

 

감히(?), 섣불리(?)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신과 악마도 숭배해야 한다는 말을. 이러한 말을 하는 순간 나쁜 사람, 특이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선한것만이 옳은 일, 바른 일,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일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그렇기에 우리는 안좋은 일을 경험하게 되면 큰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삶에서 좋은일이 일어나 듯, 안 좋은 일도 비슷한 비율로 일어날 수 있다는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문제요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통찰이 갑자기 성스러운 그림자처럼 덮쳐 왔다. 그리고 나 자신의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얼마나 깊숙이 위대한 사유의 영원한 흐름에 함께하고 있는지를 갑자기 깨닫고 느끼게 되자 두려움과 경외감이 엄습했다. 그 통찰은 무언가 확인해 주고 행복감을 주긴 했으나 기쁘지 않았다. 그것은 가혹하고 황량한 느낌이었다. 더이상 어린애일 수 없고, 이제 혼자 더 있다는 일말의 책임감이 그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 싱클레어! 

이제 우리의 생각, 말, 행동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게 어른이다. 

 

 

생각이란,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거야.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 많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을 하고 산다. 이게 얼마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알게된다.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도. 

자신만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방향에 맞게 단순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생각에만 불과한 잡생각들은 그저 내 인생의 소음일 뿐이다. 

 

 

진짜 데미안은 저런 모습이었다. 저렇게 돌처럼 단단한, 태곳적인, 동물 같은, 돌 같은, 아름답고도 차가운, 죽었으면서도 내밀하게는 들어 본 적 없는 생명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감싸고 흐르는 이 고요한 텅 빔, 이 영적인 기운과 별들 가득한 천공, 이 고독한 죽음!

 

싯다르타의 붓다, 뱃사공을 떠올리게 하는 데미안. 해탈, 고요함 그 자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

 

 

그렇게 걸으면서 자주 희열 같은 것을 느꼈다. 우울과 염세와 자기모멸감으로 가득 찬 희열이었다. 

 

이런 감정, 느껴본 적이 있는가? 청소년기에 있었던것 같기도 하다. 

어른이 된 지금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참 못난 사람 일 듯. 그리고 범죄를 저지를 수 도 있을법한 감정이 아닐까?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들을 겪는 데에는 거의 쾌감에 가까운 무엇이 있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맹목적으로 둔감하게 웅크리고 있었기에, 내 마음이 너무도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궁색하게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기에, 이런 자책이나 혐오, 영혼의 이 모든 비참한 감정들 조차 반가웠다. 그 속에는 그래도 감정이 있었고, 그래도 불꽃이 솟아올랐으며, 심장이 떨렸으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비참의 한복판에서 나는 해방이자 봄 같은 그 무엇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감정적 자극을 느끼면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좋은 감정이든, 안좋은 감정이든,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느껴볼 것을.

 

 

나는 내심 남몰래 내가 비웃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경외심을 품고 있었고, 속으로 울면서 내 영혼 앞에, 내 과거 앞에, 내 어머니 앞에, 신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본래 자신이 가진 내면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으로 잠시 그 쪽에 발 담글 수 있음), 그게 거짓이라는 것을 본인다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영혼, 내 어머니, 신 앞에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걸 알아 두는 게 좋아. 모든 것을 다 아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 말이야!

 

답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내 일은 내가 판단해야 한다.

끊임없이, 수 없이, 치열하게 고민해서 말이다. (나의 내면이 원하는것을 발견하는 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유명하디 유명한 문장.

인생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아브락사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편중되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신 하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신은 임의로 나누어 놓은 세계의 반쪽만 나타내고 있을 뿐이라고(그것은 공적이고, 허락된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계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어떤 신을 갖거나,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나란히 악마에 대한 예배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약 3번에 걸쳐 나온것 같다.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바로, 비판적 사고! 동시에 밝은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대한 존중과 인정

후반부에 전쟁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신과 악마, 선과 악에 대해 일맥상통한 의미를 전달한다. 

신과 악마로 밝은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존재한 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전쟁도 쌍방으로 보자면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렇기에 전쟁을 꼭 악한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의 한 시간이나 아무 말 없이 널름 거리는 장작불 앞에 배를 깔고 누워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윙윙거리고, 꺾이고, 휘어지고, 가물가물 흔들리다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며, 마침내 조용히 사그라져, 바닥에서 잦아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장작불을 바라보기만 했을 때의 느낌이 선명하게 글로 표현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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