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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끝났어, 이반 일리치의 죽음(by 톨스토이)

by 꿈 많은 여우 2023. 4. 11.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열린책들

 

이번에는, 책의 흐름대로 발제문은 작성해 보고,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작성해 보려고 합니다. 

 

✅ 이반 일리치의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 작장 동료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씁쓸하지만 현실적인 묘사가 아닐까? 진심으로 애도하는 마음도 당연히 있겠지만, 이반 일리치가 죽음으로 인해 이득을 볼 게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보다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마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것을 남의 죽음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은 문명화된 사회의 거짓 예의로 포장한 채 장례식에 참석을 한다. 그리고 형식적인 조문 인사 후 동료들과 게임을 하러 갈 생각에 설렌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에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온전히 슬퍼할 사람은 직계가족(때로는 이것 조차도 아닐 수 있다) 뿐일 것이고, 다른 이들은 조문할 때 잠깐의 애도만 있을 뿐이다. 

 

✅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직업적 지위와 자신이 속해있는 상류층의 삶에 만족감을 느끼며 사는 것 처럼 보인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이는가? 

계속해서 높은 지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권력욕과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누구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의 위선적인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두 문장을 보자. 

「그들로 하여금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 이렇게 격의 없이 대해 주다니>라고 느끼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며 그 사실 자체를 즐겼던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권력을 가급적 부드럽게 행사하려고 애썼다. 권력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드럽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새 직무의 가장 흥미롭고도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권력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우월감을 거짓의 선으로 행하며 본인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 또한 인간의 본능과 본성 중에 하나일 수 있는데, 이러한 위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 사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의심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인간이 가진 본성을 부정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인정은 하되, 드러나지 않은것 까지 의심해 가며 파헤치고 분석하고 보려고 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편하게 살고 싶다. 다만, 이런 사람-즉,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딱히 경외심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두 번째로, 이반일리치는 금수저는 아니다. 처음부터 상류층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상류층의 삶을 누리고자 하는 허영심이 보였다. 새 집의 인테리어를 하면서 시간과 공을 들여 상류층 사람들의 아이템과 분위기로 꾸미고,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며 만족감을 느낀다. 여기서 허영심도 보였지만, 이런 상류층의 삶을 지켜내고자 하는 불안감도 느껴졌다. 

 

✅ 이반 일리치가 자신이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억울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당장 오늘 죽는다고 해도 담담히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루하루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살면서 죽음이 언제든지 나에게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마음 가짐이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럿 듯, 죽음은 나와 거리가 먼일, 아니 내 일이 아니라는 것, 혹은 전혀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고, 목적 달성을 위해 바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인생들은 갑자기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크나큰 충격을 받는 것 같다. 잘못한 것 없이 최선을 다해 가족을 위해 살고, 사회를 위해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렇게 빨리 죽음을 주는 것인지.. 처음에는 부정하고 억울해한다. 부, 권력과 같이 내가 가진 게 많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클수록 죽음을 아쉬워하는 것 같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반 일리치 처럼 본인도 괴롭고, 그걸 보고 있는 가족도 괴로워진다. 

그러나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는 점, 삶을 살고 있음과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삶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정말 중요한 것,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며 살다가 죽음이 코앞에 왔을 때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 이반 일리치의 가족, 지인, 의사들은 죽음이 본인들에게는 오지않을 남의 일인 것처럼 선을 긋는 느낌이다.  

곧 죽음을 앞둔 사람에 대한 공감은 이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의사는 병을 진단하고 건조하게 처방만을 내릴 뿐 환자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다. 심지어 부인과 딸은 이반 일리치에게 가엾고 슬픈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그들이 지키고자 정해둔 범위 안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뿐이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입장과 그들에게도 이런 죽음이 올 것이라는 걸 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반 일리치는 그래서 더 비참했을 것이고, 자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느낀다. 

 

 게라심만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그 이유는? 혹은 게라심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게라심은 삶이라는 것 그 자체를 긍정하는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의 젊음, 자신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주인의 죽음 또한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순박하지만 고결한 삶의 빛이 난다고 작사는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좀 안타까운 점은, 삶과 인생에서 진짜 행복이나 의미를 찾아갈 때 꼭 하인을 통해서여야만 했을까, 하는 점이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게라심처럼 처음부터 삶의 참된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없는 것일까. 부와 권력 때문에 불행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부와 권력이 긍정적으로 발현된 책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참된 행복은, 게라심과 같은 하인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권력자들도 느낄 수 있는 것이길 바란다. 다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에 따라 다른 것으로 인지되었으면 좋겠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의 흔한 질문에서 이건 비교가 처음부터 잘 못 된 질문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 질병과 죽음의 고통으로 사투를 벌이면서, 어느 순간 <거짓> 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살아 온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들이, 그리고 본인이 했던 행동조차도 문명화된 사회의 거짓 행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은 동물적으로 모든 본능을 드러내고 살 수 없기에 구지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행위들은 <거짓>이라고 하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의 내면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하거나 분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거짓은 필요에 의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면 된다. 

 

✅ 『그래, 모든 게 그게 아니었어.』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괜찮아. 할 수 있어, <그것>이 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묻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것>이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마침내, <그것>은 인간의 진심에서 우러난 감정들, 즉 연민, 사랑, 동정 이런 것들이라는 것 또한 깨닫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가족들을 해방 시켜 주고자 한다. 

 

✅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 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일, 거짓없이 사는 일. 

정말 단순한 일인데, 그리고 단순하게 사는것,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죽음의 코앞에서 이 사실을 알게된것이 안타깝다. 

 

마지막에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사투는 보는 내내 안쓰러웠다. 마지막에 <죽음은 끝났어>라고 말하는 순간, 아 이제 이반 일리치의 고통이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은 여운이 남는다. 죽음과 함께해 온 우리의 삶은, 사는 것 자체가 고행이라는 우리의 삶은, 육체적 죽음과 동시에 끝나면서 우리의 고행도 끝났기에 안도하고 편안해지는 것인가.

이렇게만 이해하기에는 이 문장은 뭔가 나를 자꾸 생각속으로 끌어당긴다.

 

해설은 이렇다. '끝난 죽음'은 초월, 신비, 영원 이러한 초월성을 이야기한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가짜 기쁨이 아닌 진짜 기쁨,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 죽음이 끝난 것은 진짜 기쁨으로 가는 길? 

 

잘 와닿지가 않는다. 일단 넘어가자.

 

이 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던저준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는 죽음과의 온갖 사투를 벌이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가짜 기쁨이 아닌 진짜 기쁨을 깨닫게 된다. 진짜 기쁨이란  진짜 사랑, 진짜 연민, 진짜 동정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진짜 감정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일까? 문명화된 사회의 거짓 행위들은 존재하지만,  진짜 기쁨을 놓치는 말라는 메시지를 준 것 같다. 

 

이 책의 문장은 전체적으로 참 담백한 것 같다. 어려운 표현도 없고 화려한 미사여구나 묘사도 없다. 스토리 또한 쉽게 생각하면 아주 쉬운 책이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려운 책이기도 했다.


필사를 해보니 간결한 문장임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네요. 

 


그들로 하여금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 이렇게 격의 없이 대해 주다니>라고 느끼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며 그 사실 자체를 즐겼던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권력을 가급적 부드럽게 행사하려고 애썼다. 권력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드럽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새 직무의 가장 흥미롭고도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죽음은 모든 벽을 뚫으며 침투해 들어와 그 무엇으로도 막아 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보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의식을 그저 어쩌다가 발생한 불쾌한 사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 정도로(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응접실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대하듯이) 격하시켰다. 그가 평생토록 지키려 애썼던 <품위>라는 게 고작 그런 것이었다. 

 

거짓말 외에, 아니 거짓말 때문에,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가엾게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기간 고통스럽게 병마와 씨름하면서 이반 일리치는 사실대로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해도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 여겨 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했다. 아이를 달래며 보살피듯 다독여 주고 입을 맞춰 주고 자기를 위해 울어 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그게 아닌 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든 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려 버리는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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