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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Book, One Action

텅 빈 여백의 글자 몇 줄이 주는 인생의 미학, 인생의 역사(by 신형철)

by 꿈 많은 여우 2023. 4. 2.

 

제1절을 시작했을 때, 이 외국 시들은 너무 어렵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더군요.

읭? 분명히 한글로 쓰여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시만 읽어보면 당연히 무슨말인지 모르겠고, 해설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구나'라는 걸 알고 다시 읽어보면 해설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의미를 파악했으나 와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읽어야했습니다. 독서모임을 가야 하니까요.

그냥 읽어보자. 뭐라도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그냥 읽었습니다. 

 

절 반 이상을 읽다 보니, 이 책은 해설이 예술이었습니다. 해설이 다한다! 제가 몇 년을 시 공부를 해도 이 정도의 깊이로는 읽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독자에 따라 같은 시도 다르게 받아들여지겠지만, 제가 시를 보는 깊이는 표면적인 부분에 그쳤습니다. 

 

이 책은 이런 순서로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해설 없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였고,

해설을 본 후,  다시 보니 심금을 울리는 경우가 있었고, 

해설이 더 감동적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어떤 시는 생각의 거리를 던져 줍니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겠죠. 

텅텅 빈 여백의 글자 몇 줄들이 심장을 울리고, 긴 여운을 남기고, 깊은 생각의 거리를 던져주는 게 신기했습니다. 

이게 '시'라는 장르의 매력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고등학교 때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시 전시회를 했던 기억을 소환해 주었네요.  

 

작가가 소개한 시들 중에서 제 심장을 '툭'하고 떨어뜨린 두 편을 제 느낌과 함께 소개합니다 


장례식 블루스

-W.H.오든-

 

모든 시계를 멈춰라. 전화를 끊어라.

기름진 뼈다귀를 물려 개가 못 짖게 하라.

피아노들을 침묵하게 하고 천을 두른 북을 쳐 

관이 들어오게 하라. 조문객들을 들여보내라.

 

비행기를 하늘에 띄워 신음하며 돌게 하고,

그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기게 하라,

거리의 비둘기들 하얀 목에 검은 상장을 두르고,

교통경찰에게는 검은 면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동쪽이고 서쪽이며 남쪽이고 북쪽이었다.

나의 평일의 생활이자 일요일의 휴식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우리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으나, 내가 틀렸다. 

 

별들은 이제 필요 없다, 모두 다 꺼버려라,

달을 싸서 버리고 해를 철거해라,

바다를 쏟아버리고 숲을 쓸어버려라,

이제는 그 무엇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니.


세상의 모든 슬픔이 자기만의 것이고, 모든 이가 자신의 슬픔에 집중하고 공감해야 하는 이기성이 보입니다. 여기서 배려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슬픔 앞에 누구나 이기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겠지요. 

보통은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3절에서는 그와 나에 대한 관계가 아닌, 그가 있었기에 존재했던 나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합니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그와 있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슬픕니다. 더 이상 그로 인해 존재하던 내가 사랑하던 내 모습을 느낄 수 없기에.

마지막절, 결국에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집니다. 별, 달, 해, 바다, 숲!

세상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 잠시겠지만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별을 꺼버리고, 달을 싸서 버리고, 해를 철거하고, 바다를 쏟아 버리고, 숲을 쓸어버린다는 표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거대한 자연과 우주를 무의미하게 표현했는데 재미있기도 하고 슬픔의 고통이 확 와닿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시를 사랑하는 이가 떠났을 때, 슬픔과 절망의 표현에 감탄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신형철 작가님은 이 시의 의미를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로 더욱 깊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 속에서 나의 인분이 존재하는데 나와 관계된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인분 또한 죽는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만의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사랑했던 나의 인분의 사라짐, 그래서 오는 상실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그래서 더 슬픈가 봅니다. 


서시

- 한강 -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첫 줄을 읽고 바로 나의 심장은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날 운명이 나에게 다가와 본인이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보면, , 나는 뭐라고 말하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하게 될까 봐, 

차마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지 못할까 봐,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가엾기도 한 내 삶. 

조금 먼 이야기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운명이 나에게 찾아와 말을 붙이면

이 시에서 처럼, 저는 말없이 안아줄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

이건 나의 운명이고,

운명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고 믿으며 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운명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조금 덜 걱정하고,

조금 덜 불안해하고,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조금 더 믿음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어떠한 운명이든,

항상 나와 함께 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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